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나라의 베트남 원정 (문단 편집) === 하이동 추격전 === 응에안과 타인호아에서 패배함으로써 쩐의 전선은 무너졌고 다이 비엣의 위, 아래에서 원의 공격이 지속되자, 쩐 인종은 황망히 달아났다. 결국 오래 지속되는데다 패배로 점철되는 전쟁에 지친 나머지 태상황 쩐 성종은 인종과 상의한 뒤 원나라 군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늦춰보고자 자신의 남매 중 막내인 안자공주(安姿公主)를 원의 총사령관 토곤에게 바쳤다. 토곤은 안자공주를 받아들이며 쩐 인종과 태상황 쩐 성종도 오라고 불렀다. 하지만 결국 마음을 다시 굳게 먹은 황제와 태상황은 오히려 군을 이끌고 더 남쪽으로 도주해 버렸다. 결국 화가 난 토곤은 다시 군대를 내어 추격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쩐 구옥뚜안은 반끼엡을 떠나 황제를 구하고자 했다. 쩐 구옥뚜안은 우선 거대한 배를 구해 응옥산(玉山) 일대로 휘몰아 원나라 군의 이목을 끌면서 몰래 작은 배를 타고 나아가 두 황제를 구한 뒤 자오하이(交海)를 통과해 바다로 나아갔다가 북상해 치응우옌(雉完)으로 되돌아갔다. 자기 눈앞에서 쩐의 군주들을 놓친 토곤은 화가 났으나 쉬게튀가 보낸 장수들과 만난 뒤 쉬게튀의 군대가 식량이 부족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급하게 추격군을 꾸리지 않는 대신 천천히 티엔즈엉으로 진격할 것을 명했다. 한편, 쩐의 황제들이 하이동으로 달아난 것이 확인되자 토곤은 이항, 우마르, 자오키 등을 보내 추격하게 했다. 1285년 4월 7일, 쉬게튀의 군대가 티엔즈엉으로 진격하는 것을 발견한 두 황제는 배를 버린 뒤 남쩌우 강(南兆江)에서 배를 다시 타고 다이방(大旁)으로 돌아가면서 적의 추격을 피했다. 원의 군대는 아직 수군 조달에 미숙했는지 자오키와 탕우타이의 수군은 4월 15일이 되어서야 땀지(三雉)에 도달할 수 있었고 이항도 수군을 몰고 두 황제를 수색했으나 마주치지도 못했다. 이후 원나라 군은 쩐군이 남겨둔 배 몇 척을 찾아냈고 그제서야 쩐 인종과 쩐 성종이 이미 뭍에 배를 정박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나라 군은 뒤늦게서야 사태를 파악하고 3일 밤낮을 추격했으나 이미 두 황제는 황자들이었던 쩐 롱(陳 弄), 장수 팜 끄디아(范 巨地), 레 지엔(黎 演), 찐 롱(鄭 龍) 등 귀족과 장수들이 흩어져 있던 쩐의 군대를 휘몰아 오고 있던 타인호아 일대로 사라진 뒤였다. 이 소식을 들은 토곤과 우마르는 1,300명의 수병을 데리고 타인호아로 진격해 황제를 추격했지만 잡지 못했다. 쩐 구옥뚜안은 일단 지도자들이 위기에서 벗어나자 타인호아에서 철수한 뒤 병력을 재편성하기 시작했다. 한편, 북부에서 온 토곤의 원나라 군은 맞지 않은 풍토와 더운 날씨, 폭우와 풍토병으로 인해 고생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쉬게튀가 우마르와 함께 쩐 황제들을 추격했지만 결국은 찾는데 실패한데다 풍토로 인해 사기가 너무 떨어져 추격을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한편 직접 부딪히면서 원나라 군이 풍토로 고생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쩐 구옥뚜안은 4월에 북쪽으로 돌아왔고 곧바로 군을 모아 콰이쩌우(快州)를 지나는 홍강 구간의 원나라 군 진지를 공격했다. 이 지역을 점령하면 쩐군은 그 곳을 기점으로 탕롱을 공격할 계획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